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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을 찾아서


우리 주위에는 청소년불가라는 여러 법과 제도들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건전한 사고와 건강한 성장을 위한 우리 사회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19금을 찾아서'는 실제로 현실에서 제대로 청소년들을 보호하고 있고 그 약속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기사입니다.


[19금 파헤치기] 춘화(春畵), 김홍도 신윤복 성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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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916회 작성일 15-12-1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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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파헤치기] 우리가 몰랐던 역사 속 19

춘화(畵), 김홍도 신윤복 성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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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보면 여러 왕들의 이야기, 전쟁이야기,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여러 문화와 관련 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늘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는 역사의 무대... 이 무대의 뒤편을 상상해 보았는가? 모두 알다시피 조선시대 문화는 일부다처제로, 왕들 또한 많은 후궁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첩이 많았던 만큼, 그들에게 숨겨진 속(?) 이야기들도 많지 않을까? 뿐만 아니다. 현대 사회와 비슷하게 조선시대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섹드립(?)과 각종 19금 이야기들이 널리 유행되었다고 하니 벌써부터 궁금하지 않은가? 우리 역사속 19금 이야기들을 [19금 톡톡]에서 펼쳐 본다.  

 

 

45cm의 주인공, 지증왕 실제는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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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토우들은 남여의 성기를 해학적으로 묘사한 것이 많다>


신라 마립간 시대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지증왕을 아는가? 신라의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이라는 칭호를 가장 처음 사용한 왕이기도 한 그는, 크나큰 업적만큼 비범한 사이즈(?)를 지녔다고 한다. 다음은 <삼국유사>의 지증왕 설화이다.



(전략)...그의 음경의 길이는 무려 1 5치였는데음경이 너무 큰 관계로 마땅한 신붓감을 구하기가 어려웠다그래서 지증왕은 각 지방에 사자를 보내 자기의 음경을 능히 감당할 만한 처녀를 수소문하였다어느 날 지증왕이 보낸 한 사자가 모량부에 도착해 동로수(冬老樹)아래에 쉬고 있는데큰 개2마리가 북 만한 누런 똥을 양쪽에서 물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이것을 본 사자는 쾌재를 부르며 마을로 내려가 그 커다란 똥덩이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그러자 한 소녀가 말했다. 

"그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 숲속에 숨어서 눈 똥입니다."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 처녀를 보니 키가 7자 5치나 되었다사자는 급히 지증왕에게 그 처녀를 소개했고지증왕은 수레를 보내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왕비로 삼았다.


 

여기서 한 자는 대략 30cm 정도로, 15치라고 하면 대략 45cm 정도가 된다. 과연 정상적인 관계는 둘째 치고 거동은 가능했을까 하고 의문이 들 만큼의 어마어마한 사이즈다. 또한 이 설화에 등장하는 처녀의 경우, 키가 75, 2m 25cm 라는 것은 당시에는 불가능 한 일이다. 이 설화는 지증왕의 실제 외형을 기반으로 하되, 왕의 위대한 업적과 위대함을 신격화하기 위해 실제보다 과장해서 퍼뜨린 전설이라고 여겨진다. 

 


희대의 패륜아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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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문란폭정.. 온갖 수식어가 달라붙는 연산군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역사적으로 남아있는 기록들을 보면 그는 엄청난 폭군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전국에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 곳곳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이게 하고(그 수가 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기생궁녀친인척,사대부 부인까지 가리지 않고 간음을 하였다심지어는 자신의 큰아버지의 부인즉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의 친형의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고도 전해진다이에 박씨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그녀는 스스로 약을 먹고 자결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간음을 하는 데에 있어서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가마 안은 물론이고 길가에서도 간음을 했다고 전해진다또한 나라의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기생의 거처로 만들어 온갖 유흥과 쾌락의 장소로 바꾸어버렸다이 기생들은 바로 흥청이라고 불렸는데그 수는 천명이 넘었다고 한다왕이 이들과 함께 잔치를 열고 유흥을 즐김으로 인해 나라 재정이 궁핍해지자 흥청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뜻의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생겨났다이렇게 연산군은 왕으로 부임해 있는 기간 동안 인륜을 넘어서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대략 천명 이상의 여인을 간음했다고 전해진다.



 

세종 며느리의 '금지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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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 드물게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킨,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왕이다. 그의 스트레스 원인은 바로 부인에게 있었다. 그는 세 번이나 홀아비가 됐던, 개인사가 불행한 왕이었다.

 

두 번째 부인은 조선왕실 최초 동성애 스캔들의 장본인인 세자빈 봉 씨다. 아름다운 미모로 세자빈 자리를 꿰찬 순빈 봉씨는 후일 궁녀 소쌍과의 동성애 사건으로 폐출된다. 조선 왕실에서 궁녀들의 연애는 금지됐다. 발각되면 사형이었다. 그러나 때로 수백명에까지 이른 궁녀 모두가 왕의 손길(승은)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궁녀들의 연애간통사건이 적지 않다. 상대는 때로 종친이었지만 주로는 내시와 별감이었다. 죽음이 두려우나 사랑엔 목마른 궁녀들은 동성애에 빠졌다. 때로는 왕이 외면하는 왕비나 후궁이 궁녀들과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으니 세자빈 순빈 봉씨의 동성애 사건이 그러했다.

 

세종 181026일 기록은 이렇다.

"내가 중궁(왕비를 높여 이르던 말)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실록에는 봉 씨의 죄목이 질투심이 많고 아들을 낳지 못했으며 남자를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고 적혀 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동성애는 지금도 터부시하는 이들이 많다. 조선 초에는 이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세종도 자신의 며느리가 저지른 죄목을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웠을 것이다. 이에 분노한 세종은 순빈 봉씨를 폐출시켰다. 


 


일반인이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되다?

어을우동, 왕실과의 성문란으로 역사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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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행적을 기록하는 조선왕조실록에, 일반인이 기재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성종실록에 어을우동으로 기록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어우동은 본래 궁중 관리의 딸로써 부유한 집안의 신분 높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양반의 부인이었으나, 왕실의 종친중 한명과 남편 몰래 문란한 성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관계가 계속되다 남편에게 들키자 집에서 내쫓겼다. 이때부터 어우동은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였다. 심지어는 그의 계집종과 함께 남자들을 끌어들여 잠자리를 같이하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성종실록에서는 어우동은 여러 왕실의 종친들과 함께 잠자리를 하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어우동의 행동을 보다 못한 사헌부 대사헌 정대괄 등은 상소를 올리기 까지 했다. 사간원에서는 어우동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한 왕실의 종친들에 대해서 죄를 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사건의 발단인 어우동에 대해서는 극형에 처하게 하였다. 이는 성종이 이 사건을 본보기로 삼아 다른 여인들이 좀 더 정숙하고 풍기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석된다. 조선시대에서 보기 힘든 모습의 여인이었기 때문일까? 현대에서는 이 어우동 사건이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쓰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다산Top 5

 

순위

임금

자녀수

1

태종

1217= 29

2

성종

1612= 28

3

선조

1411= 25

정종

178= 25

5

세종

184= 22

    

조선시대 이전을 포함하면 실제로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은 고려시대의 태조 왕건(259= 34)이다.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할 정도로 왕들은 많은 자녀를 낳았다. 예로부터 왕들은 최대한 많은 자손을 남겨 왕실의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후궁을 두고, 왕비를 두었다. 이렇게 많은 자식이 많지만 실제로 우리가 알만큼 이름이 알려진 왕자나 공주들이 적은 이유는 어려서 죽거나, 후궁의 자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성들을 달래준 므흣(?)한 작품들

춘화(畵), 김홍도 신윤복 성을 그리다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알 고 있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요즘말로 치면 포르노그라피, 외설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9춘화라고 하는 그림인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남녀간의 성애장면 묘사가 가희 미성년자 절대 관람 불가라고 할만하다. 조선시대 성풍속도를 엿볼 수 있는 춘화가 그 시대에도 유행하고 있었다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이있기도 하다.

 

춘화는 그 나라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된 거라 나라마다 다르다. 몽골 춘화는 말 타고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인도의 춘화는 마치 요가를 하는 것 같다고 한다. 또 중국은 무술영화처럼 소림사 스타일의 뻥이 에로틱 아트에도 적용됐다는 우수갯 소리가 있다. 일본 춘화는 섬세함이 떨어져 거칠고 남녀 구분도 잘 안되는 것으로 평가 된다.

 

이웃나라의 춘화들이 그러했다면, 한국의 춘화는 어떤 멋과 풍류를 담고 있을까. 우리 춘화는 아주 서정적이다. 그러니까 그림을 볼 때 배경을 꼭 같이 봐야한다는 것이다. 진달래가 흐드러진 곳이나 물이 한껏 오른 버드나무 옆에서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세팅'이 기가 막힌다. 주인공과 무대를 같이 봐야 한다는 얘기다.

 

단원 김홍도(1745~1808?)의 화풍이 드러나는 운우도첩은 조선후기 춘화 가운데 가장 회화성이 뛰어나고 격조를 갖춘 작품으로 춘화의 백미로 평가된다. 또 조선 최고의 춘화첩 가운데 하나인 '건곤일회첩'은 혜원 신윤복(1758~?)의 춘화로 전해진 작품이다. 단원은 서민 생활의 단면을 소박하고 유머 넘치게 다뤘지만, 혜원은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남녀 간의 춘의(春意)를 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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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춘화 작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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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도의 춘화 작품중>



[취재/박주희(경해여고2), 하준승(명신고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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