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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용의 재미있는 과학&역사 이야기]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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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05회 작성일 15-08-25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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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용의 재미있는 과학&역사 이야기] 


제1화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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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지 않으면 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믿기 위해서는 직접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눈앞에 확실히 보이는 것들을 모두 부정하고 그 반대로 믿으라고 한다면 과연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천체들의 운동이 그렇다. 해와 달은 동쪽 지평선 위에 떠서 서쪽 지평선 아래로 진다. 별들도 똑같은 방향으로 뜨고 지기를 반복한다. 즉, 지구는 가만히 있고, 천체들 모두가 우리 지구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음에도 눈에는 그 반대로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진실이 눈에 보이는 것과 반대인 경우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태양과 지구의 운동과 관련해 눈에 보이는 것과 반대되는 것들이 진실임을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믿으며 살고 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명 수준이 현재와 다르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과거 16세기 이전의 유럽으로 시공간(視空間)을 이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시기에 태양중심설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가는 기독교 교리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과학은 때때로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진위 여부가 결정되기도 한다.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결코 중요하지가 않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 어떤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는 것이냐가 오직 중요할 뿐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의 중심은 지구이고, 천체들은 분명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확신했던 그 시기에 유독 태양중심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했던 것일까?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라고도 불리는 그 과정을 한번 살펴보자.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폴란드 토론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정형편이 어려워졌으나, 가톨릭 주교였던 외삼촌의 후원을 받아 어렵게나마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외삼촌이 학비를 조달하여 당시 폴란드의 명문대학이었던 야기엘로니안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다음에는 폴란드 가톨릭 교구의 지원을 받아 다시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동로마제국 멸망(1453년) 전후로 유럽으로 유입된 그리스 고전(古典)들이 화려하게 부활하며 피렌체의 아카데미아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면서 각 분야의 학문들은 오랜만에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플라톤 사상이 여러 시대적 그리고 지역적 요소들과 융합하여 진화된 신(新)플라톤주의를 접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 학자들은 정통(正統) 플라톤주의와 차별화된 이론을 펼치면서 학문 연구 방법과 관련해 새로운 기준들을 제시했는데, 당시 신플라톤주의 학자들 몇몇은 오랫동안 의심 없이 신봉하던 지구중심설에 의문을 가지며 새로운 우주론을 조심스레 구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구체적으로 정형화된 태양중심설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당시 태양중심설을 연구하던 선각자들은 지구중심설이 진실이라고 규정한 기독교 교리(敎理) 말고도 넘어야 할 산맥이 두 개나 더 있었다. 하나는 수학적으로 체계화되어 1300년 동안 천문학계를 이끌어 오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었고, 또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당시 모든 대학에서 천문학의 정통으로 여겨지며 계승되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은 천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해석적 기준으로 유럽의 학풍을 견인하고 있었다. 당연히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수학적 표현이었으며, 기독교 교리 역시 지구중심설을 채택하고 있었기에 이 세 축(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은 당시 세계관을 구성하는 삼위일체가 되어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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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두리에는 ‘신과 모든 선민(選民)들이 임하시는 지상을 지배하는 하늘’이라고 적혀있다.

【16세기에 그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도-지구중심설】

 


코페르니쿠스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계승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프톨레마이오스가 사용한 수학적 도구를 그대로 사용하여 수리적 논증을 통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 모순됨을 증명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 역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용하던 삼단논법을 그대로 응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 우주론의 한계를 반증했다.


이처럼 새로운 도구나 조건들이 제공되지 않고, 기존의 조건과 방식들만을 동원해 (상반된 이론의 모순들을 증명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출해 내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을 모두 유린시켰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세계관을 전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기독교 교리는 이 세상의 존재 이유와 진행 방식들이 유일신(唯一神)이라는 절대적 존재의 계시(啓示)를 통해 설명되고 천명된 것들이었으므로, 인간의 (관찰과 실험에 의한) 감각적 활동에 의해 밝혀진 것들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교리의 권위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것이었다.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자연철학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태양중심설을 논증했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그 내용이 반드시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출판됨으로써 교회 당국의 맹렬한 비판과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한편 코페르니쿠스가 제안한 태양중심설은 곧장 학계에 쉽게 수용되지 못했는데,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1543년에 출판되고 1600년이 될 때까지 티코를 비롯한 여러 천문학자들에 의해 정통적 지구중심설이 안고 있던 몇 가지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도구로서의 역할로만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일부 요소들이 차용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케플러, 갈릴레이를 비롯한 극소수의 학자들이 보다 세련된 수학적 논증들을 이루어 내고, 또 한편으로는 망원경 관측 결과의 면밀한 분석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계승하며 발전시켰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엽까지 학계에서 상당한 논쟁을 거친 후, 뉴턴에 이르러서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일명 ‘프린키피아’)』를 통해 비로소 태양중심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천문학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사건들은 다음 시간부터 하나씩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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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용 (동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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