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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기행] 제1편 광복과 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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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117회 작성일 13-02-2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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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광복과 미군정
 
 
건국준비위원회, 통일조국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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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16일, 군중 연설을 마치고 나오는 여운형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왜적이 항복한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 그 보다도 더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약하리라는 것이다.”  광복을 마냥 기뻐만 할수 없었던 백범 김구선생의 한탄은 고스라니 우리 현대사의 질곡으로 나타났다.
 
일제치하 우리민중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왔고 무장투쟁도 불사하며 싸웠다. 임시정부도 만들고 급기야 국내진공작전도 수립할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의 투쟁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미국과 소련등의 외세가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 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인 현실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독립국가를 오랫동안 준비해 온 조선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전국 각지의 인민위원회가 일사분란하게 만들어졌다. 1945년 8월 말경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소에 이를 정도였고 전국적으로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로 그 어떤 혼란도 없었으며 치안도 유지가 될 정도로 질서정연했다. 마치 곧바로 독립된 통일조국이 눈앞에 있는 듯 하였다.
 
광복 후 초기 인민위원회에서 이념과 사상은 하나의 통일조국 건설이라는 명제 앞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좌익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함께 모범적인 자치조직을 만들었고 당시 열악한 경제상황에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을 생각하면 그 어떤 약탈행위나 학살행위를 자제하며 질서가 유지 된 것은 우리민족이 얼마나 하나된 마음으로 독립을 준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실체적 모습이었다.
 
미군정, 역사를 꺼꾸리 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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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09.09 조선총독부, 하강하는 일장기, 게양하는 성조기>

해방과 더불어 국가 건설을 위한 환희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그것은 해방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서의 일이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 남한을 점령 선포함으로써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조선총독부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며 38선이남의 남한을 점령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미국은 남한에서 미군정 외의 그 어떤 형태의 정부도 인정할 수 없으며, 미군정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떤 세력도,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미군정은 전국 각지에 친일파와 민족박역자가 제외된 민중자치조직이었던 인민위원회를 해체시키고 일제 식민지 당시 군인 경찰등 관료체제를 그대로 복원하였다. 또한 숨고 달아났던 친일부역자, 지주등을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면서 대한민국의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었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친일 잔재청산, 친일 인명사전등 과거사 정리가 과제로 남게 되는 태생적인 원인이 되었다.
 
신탁통치반대, 분열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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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의 대대적인 보도는 전국적인 반탁 운동을 불러왔고, 한민당은 소련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전후 한반도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여 온 미소영의 루즈벨트, 스탈린, 처칠 3명이 모여 모스크바 3상회의를 열었고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결정했다. 회의의 주된 결정은 한국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고 신탁통치안은 이미 전쟁 중 미국에 의해 구상되고 카이로·테헤란·얄타회담 등에서 제안되었다. 미국은 이전에는 30년이상 신탁통치를 주장하였으나 소련의 강력한 반대로 5년으로 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이 미군정으로 인해 좌우익의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동아일보가 마법을 부린다. 즉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하였고 미국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다라는 사실과 정반대인 모스크바3상회의의 내용을 진실인 것처럼 허위보도를 한 것이다. 당연히 즉각 독립국가 수립을 원했던 민중들은 좌우익을 불문하고 거센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뒤 모스크바3상회의의 진짜 결정문이 전해지며 좌익진영쪽에서는 결정문지지를 하게 되고 미국과 이승만 한민당등 친일 우익세력들은 진실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반탁 반공 반소 운동으로 확대해 가게 된다.
 
결국 실제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은 조선의 자주독립국을 위한 한시적인 신탁통치안이었고 그것이 현실적인 대안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극렬한 찬탁 반탁의 분열을 통해 지지기반이 없었던 이승만과 한민당에게 그 입지를 마련해줌은 물론 좌우익의 갈등을 증폭 극대화 하였다. 이러한 분열은 곧 하나의 독립국가 건설의 씨앗을 고사시켜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하에서도 굴하지 않은 반일투쟁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지켜온 사회주의 계열을 졸지에 매국노로 전락시켜 버렸고 아이러니 하게도 부일협력의 친일파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 동안 자신들의 저지른 죄로 숨을 죽이고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신탁통치 분쟁과정에서 '천형 같은' 친일의 원죄를 벗어던지고 신탁통치반대라는 가면을 쓰며 애국자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분단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 미·소군의 남북 분할점령이라면 신탁통치 문제로 시작된 민족 내부의 분쟁과 분열은 그 두 번째 단추에 해당한다. 그 세 번째 단추는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이었고, 네 번째 단추는 남북에 두 개의 국가 수립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추는, 그것으로 분단의 빗장은 너무도 견고한 것으로 굳어지고 만다.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한반도의 분단은 이렇게 시기마다 단계를 밟아가면서 더욱 견고하게 자물쇠를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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