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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진주를 찾아서] 우리는 논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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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1건 조회 3,797회 작성일 14-07-0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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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진주를 찾아서] 우리는 논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제는 당신은 가슴아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진주시민이라면 한번쯤 진주성에 가봤을 것이다. 진주성에는 김시민 장군 동상, 대숲길, 국립진주박물관, 촉석루 그리고 기막힌 경치 등 볼거리가 아주 많다. 하지만 진주성, 촉석루하면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바로 논개다. 사실 논개에 대해서는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진주는 몰라도 논개는 안다는 얘기를 할만큼 진주의 상징적인 인물이 논개이다

진주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니는 우리는 과연 논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외지 사람들이 논개에 대해 물어 본다면 우리는 몇분이나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질문들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420여년전 이 곳 진주에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침략자 일본에 항거했던 논개, 그녀가 아직도 편히 잠들지 못하는 오늘의 논개를 찾아 보았다이번호 [숨은 진주를 찾아서] 에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기억해야할, 진주의 여인 논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논개의 일생


사당비.jpg

< 의암사적비는 논개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의암에서 촉석루로 올라가는 길목 암반 위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는 '어우야담'에 기록된 논개에 대한 내용을 인용하여 정리하고 논개를 기리는 정식의 시가 새겨져 있다.>


논개는 선조7(1574) 지금의 전북 장수에서 주씨성을 갖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논개가 어린 시절 죽었다 하고, 그리하여 논개는 숙부의 집으로 보내졌는데, 그 숙부는 조카 논개를 그 지방의 토호세력의 아들에게 민며느리로 팔아 버렸다. 이에 논개는 멀리 외가집으로 도망을 갔다가 잡혀 관가로 끌려 오게된다. 관가로 끌려 온 논개는 재판을 받게되는 데 그 주관자가 나중에 부부의 연을 맺는 '최경회'라는 사람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고난 최경회는 논개의 억울함을 이해하고 무죄방면을 하게 된다.

 

논개를 심판한 최경회에게는 병약한 부인이 있었다. 최경회부인은 남편에게 논개를 '측실'로 받아 들일것을 권유하였다. 그후 최경회부인은 사망하였고 논개는 최경회의 측실로서 부부의 연을 맺게된다(선조 24년이니 그녀의 나이 17살때이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진다. 최경회는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다수의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우게 되는데, 마지막으로는 진주성 싸움을 직면하게 된다. 1차 진주성싸움에서 대패한 왜군은 10만여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였고 결국 함락 당하고 만다. 왜군들은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분풀이 하듯 성안의 군인 민간인 가릴것없이 수만명을 도륙을 하였고, 성을 지키던 김천일 최경회등은 자결을 함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들은 지옥도와도 같았을 진주성안에서 승전의 자축연을 가진다. 그리하여 성안에 기생들을 불러 들였고 최경회 장군의 죽음을 알았던 논개는 '기생의 복장으로' 그 자축연 행사에 참가한다. 그리하여 진주성 함락에 선봉장이었고 가등청정의 부장이었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절벽위로 유인하여 마침내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짐으로써 최후를 맞는다



진주와 장수의 논개

 

진주는 논개가 순국한 장소이고 당연이 논개는 진주시의 상징이 되어 왔다그러나 전북 장수군 역시 논개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논개를 자기 지역의 자랑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장수군은 논개의 숭고한 나라사장 정신을 기리고 군민화합을 다지기 위해 1954년 논개사당인 의암사를 건립하는가 하면 매년 음력 9월 3일 주논개 탄신일을 기념해 의암주논개 문화행사와 군민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또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는 논개 생가를 새롭게 조성해 관광객을 맞이 하고 있다.

진주시는 논개를 당시 국가가 내린 시호대로 '의기'(기생신분)로 칭하고 있는 반면 장수군은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의 '주씨 논개부인'으로 칭하고 있다한때는 논개를 두고 양 지자체가 감정싸움이 격화 되기도 했다.




논개5.jpg
<장수군의 논개 캐릭터> 
논개6.jpg
<진주시의 논개 캐릭터> 


왜곡된 역사는 진행중

일본 게야무라 로스쿠케의 첩이 된 논개?


일본보수원.jpg


은퇴한 일본인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가 진주를 찾았다.

'신의 칼' 이란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임란때 쇼군으로 승승장구한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진주성싸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술을마시다 '논개'라는 조선여인에게 죽임을 당한것이니 말이다. 게야무야를 흠모했던 우에쓰카는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참으로 기가막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73년 진주를 찾아와 자신은 논개를 존경하는 일본인이라는 마음을 비추면서 한-일간 역사적 화회와 교류, 영혼들의 원풀이라는 주장으로 진주에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져 이를 일본으로 모셔가는 의식을 치룬후 남강에 국화를 뿌리고 1천마리의 종이학을 띄웠다. 그리고 그는 히코산에 게야무라와 함께 논개의 무덤을 만들었다. 논개가 순국한 진주에서 나무, , 모래 그리고 돌을 가져다 게야무라 사당옆에 논개의 무덤을 꾸몄고 논개의 영정과 똑같은 영정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는 논개를 게야무라와 영혼결혼식을 시키고 그의 부인과 처제의 영정옆에 첩으로 세워놓았다. 당시 진주시에서는 그의 말도안돼는 주장을 믿으며 흡족해하고 적극 협조했다고 한다. 이에따라 일본에서는 '전쟁중에 게야무라와 논개가 만나 전쟁이 끝난후 논개는 그를따라 일본까지 따라와서 함께 해로하다 죽었다' 는 기가막힌 이야기까지 만들어졌고 논개는 일본에서 '부부금실을 좋게 해주는' '섹스의 신' 으로 사람들이 모시게 되었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줄도 모르고 당시 진주시에서는 우에쓰카에게 감사장까지 선사했다.


논개의 의로운 죽음이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는 데 147년이 걸렸고, 그가 기생이 아니라 의병장의 아내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400여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적장 게야무라와 함께 있는 그의 영정과 영혼이 한국땅으로 되돌아와 그가 편안히 잠드는 데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의로운 조선의 여성 주논개가 땅 속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논개 영정이 바뀌다

친일화가의 영정을 품고 있었을 논개의 마음은 어땠을까?

 

진주시는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 논개'1960년대부터 진주성 의기사에 걸어놓았는데, 한 차례 도난되었다가 다시 찾은 뒤 복사본을 걸어놓았다. 1993년부터 진주지역에서는 '친일 논개영정'을 뜯어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으며, 독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진주시민운동본부는 2005510일 강제로 '논개영정'을 뜯어냈다.

이에 따라 진주시와 장수군은 2005년 공동으로 논개영정을 새로 제작하려고 전국 현상공모를 실시해 윤여환 충남대 교수의 작품을 선정했다. 윤 교수가 2년여의 산고 끝에 제작한 논개영정은 200824일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전통영정기법으로 제작된 논개영정은 얼굴 형태, 복식이 수차례 수정되고 가채머리에 대한 보완이 이뤄지는 등 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완성됐다.


논개1.jpg
<2005년 시민단체 회원들이 진주 의기사 논개 영정을 떼어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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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


논개4.jpg
<공모와 고증을 통해 완성된 논개영정 >

논개2.jpg
<전북 장수의 논개 석상도 2012년 새로운 영정에 맞게 동상으로 바뀌었음>


진주교에 있는 논개의 쌍가락지

 

논개 반지.jpg

논개 반지2.jpg


진주사는 사람이면 자주 지나치고 학생들도 버스타고 흔다게 지나다니는 진주교. 그 다리에는 논개를 상징하는 의미있는 조형물이 있다. 바로 금빛의 쌍가락지다. 다리 밑에는 거대한 황동 쌍가락지가 다리위에도 쌍가락지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죽을 때 혹시라도 깍지 낀 손이 빠질까봐 손가락에 끼었다고 하는 가락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함께 진주성을 거닐어 보자 !

요즘 학생들은 피시방, 노래방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많기 때문에 진주성에 가본지 꽤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진주성을 떠올릴때 따분하고 지루할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저 멀리 아름다운 남강다리를 바라볼 수도 있다. 또한, 역사 공부가 중요해진 만큼 국립진주박물관과 촉석루와 의암바위에서 남강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구경거리이다. 특히나 진주대첩과 논개등 우리지역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현장이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할 수 있다. 
진주성은 진주 소재 학생증을 제시하면 무료로 입장가능하니 한번쯤 구경도 하고 친구들과의 약속장소로도 참 좋을 것 같다. 물론 이성친구들끼리면 데이트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취재 : 이동규(중앙고2),김동창(진양고2)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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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빙님의 댓글

작성일

이건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알아야할 기사네요...
논개를 게야무라와 영혼결혼식을 시키고 첩으로 만든 일본의 야비함과 이를 도와준 진주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때 진주시 담당자들과의 인터뷰 등
후속 기사가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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