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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기행] 제4편 이승만정권과 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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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425회 작성일 13-06-1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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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국민들이 철거했던
독재자의 동상이 2011년 남산 그자리에 다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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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현대사기행을 통해 일제로부터의 광복, 그리고 미군정, 단독정부수립과 남북전쟁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한국전쟁이라는 엄청난 비극은 남북 모두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며 분단의 고착화와 남북의 각 정권은 그들의 체제와 권력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서로를 이용하는 질곡의 역사를 시작하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임시정부, 미군정과 5.10 남한 단독선거, 4.3항쟁,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진정한 대한민국 민중을 대표할만한 지도자인가? 그런 이승만정권이 국민을 위한 정부인가라는 정체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그 역사적 근거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대통령이고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임은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역시 그 위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부패와 독재로 국민들에게서 심판받은 이승만 정권의 공과사를 구분해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 : 민주주의 기반한 정부수립의 초석
 

이승만 정권은 일제강점기 이후 대한민국에 처음 수립된 정부라는 것에 큰 정치사적 의의가 있다. 특히 보통선거로 치러진 5.10 총선거를 통해 수립되었기 때문에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절차에 근간하여 수립된 정부라는 점이 큰 의의로 작용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우리나라 헌법 제1조항의 실제적 예시가 되는 주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 정치사에 자유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부수립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두 번째 이승만 정권의 긍정적 요인은 당시의 어려운 재정에도 교육을 중시하였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부는 한글 교재를 개발하고 배포하여 문맹률을 현저하게 낮추었으며 국민학교를 의무교육으로 지정하여 국민들의 전반적인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이를 위해 이승만 정부는 학교를 대폭 증설하였고 일제 강점기의 일본어 교육방식과 획일적인 사상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난 교육을 지향하고자 교사들을 재훈련하였다.그러나 지식인들 중 친일 세력이 많았기 때문에 교사들 중 친일세력이 다수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족교육이 이루어 졌느냐에 대한 질문은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세 번째 이승만 정권의 긍정적 평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진정한 주권국가로 대접받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권 수립 후 우리나라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미국과 유엔의 원조에 의지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을 극복해내며 대한민국의 안보와 외교, 군사, 경제, 교육 등 다방면의 발전을 도모하였고 국제사회에서 점차 주권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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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패한 독재권력, 친일파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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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에서 가장 큰 부정적인 평가로 작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독재정치를 펼쳤다는 점이다. 1948년부터 1960년 하야까지 이승만 정부는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등 헌법을 두 번이나 고쳐가며 무려 3선에 성공했고, 이는 국민들이 원하여 대통령에 재임한 것이 아니었다는 커다란 한계를 지녔다.
이승만 정부는 3.15 부정선거와 같은 부정수법과 때로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같이 정적 제거까지 감행하며 재임을 이루어 냈고, 당시 거의 모든 정치적 정책은 결국 이승만 정권의 정권유지와 집권연장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국민들을 위한 정책보다는 그저 장기집권을 위한 정책개진으로 변질되어가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국민들은 이에 점차 반발하게 되었고 결국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국민들의 손으로 하야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부정적인 평가요소는 친일파를 제대로 처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던 당시 우리나라는 상당한 혼란기에 빠져 있었고 새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가 필요했을 것이며, 문맹률과 비 교육률이 높았던 당시에 일본 등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필요했다는 이승만 정부측의 주장도 어느 정도 타당하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친일파들은 반드시 처단해야 했으며 친일행위를 한 자들에 대해 반민특위를 통해 적법한 처벌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친일세력이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이루게 되자 당시 강력하게 주장하던 반일 외교노선과는 모순되는 대 친일파의 정치적 행보를 보여주어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특히 제헌국회가 설립한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적절한 친일처단을 진행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였고, 그 결과 다시 친일파들이 세력과 자본을 탈환하고 큰 목소리를 내게 하는 데에 커다란 일조를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까지도 친일파 문제가 대두되게 되었고 한국 정치사 전반에 걸쳐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세 번째 부정적인 평가요소는 6. 25를 방비하지 못했던 한국전쟁 당시의 이승만 정권의 모습이다.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이에 반하는 세력들을 숙청하려 하였으며 미국에게 북진통일을 외치며 이를 지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북한은 우리보다 군사, 경제면에서 훨씬 앞서 있었고,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서 북진을 외치는 이승만을 견제하려 했다.
만일 이승만 정부가 미국에게 북진통일에 대한 긴장을 유발하지 않았다면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아 국력을 신장하고 미군 철수를 막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제고된다. 따라서 6. 25 한국전쟁 발발을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기에 다소 섣부르고 북진통일론으로만 편협해져 있던 이승만 정권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사흘 만에 모든 전선이 무너질 처참한 상황에도 이승만은 잘못된 보고만을 믿고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 단언하여 서울 시민들이 제때 대피하지 못했고 10만 명 이상이 납치 및 숙청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비밀리에 피난을 가 있었고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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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충성했던 백선엽은 이승만의 총애속에 승승장구 했다>
   
 

3.15부정선거에서 4.19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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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315일에 무슨일이 있었을까요?
자 두 번 말 안해도 알죠?” “알았다니까 작대기 한 개 있는 이승만 대통령 칸에 동그라미 치라는 말이잖아 누구를 바보로 아나” “서로 세 명씩 들어가서 상자에 표 집어 넣기 전에 서로 확인 해야 돼요
1960315일 제 4대 대통령을 뽑는 날, 전국 투표소에서 벌어진 모습이었답니다.
이승만정권은 오랜 독재에 등 돌린 국민들에게 겁을 잔뜩 먹었고 선거에 이기기 위해 갖가지 희한한 부정투표방법을 사용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3인조나 5인조 투표였답니다. 투표장에 들어 갈 때 3명씩, 5명씩 조를 이루어 들어가 서로 누구를 찍었는지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입니다. 미리 이승만을 찍어 놓은 가짜표가 든 투표함을 진짜 투표함과 바꾸어 놓기도 했습니다. 선거결과는 예상대로였겠지요. 투표를 한 사람 수보다 이승만을 찍은 표가 더 많이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당황한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개표를 중단했고 지나치게 높게 나온 지지율을 낮춰서 다시 발표하는 소동까지 빚었습니다.
부정선거 중단하라
부정선거에 분노한 마산의 학생과 시민들은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데모하는 놈들은 모두 빨갱이다. 북한의 지시를 받은 공산당이다경찰은 최루탄과 총으로 무장을 하고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습니다. 시위는 곧 움츠러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달쯤 지난 411, 또 다시 전 국민을 분노케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마산 앞바다에 학생 시체가 떠올랐대” “지난번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때 죽은 학생이래” “그냥 죽은게 아니라 머리에 최루탄이 박혀 죽었대
마산시민들은 눈앞에서 끌어 올려진 시신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고 분노가 치올랐습니다. 마산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습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에도 학생과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419일이 되자 시위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서울에서는 10만여명의 시민이 이승만 대통령이 일하는 경무대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역적을 몰아내자” “315 선거를 다시 하라” “친일파를 몰아내자시위대는 총 든 경찰과 대치했습니다.
탕탕탕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아댔습니다.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놀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흩어졌지만 곧 다시 모여 들었습니다. 이번만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이날 시위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200여명, 다친 사람이 6천명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릅니다.
피의 화요일은 승리의 화요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이 날을 계기로 시위는 부정선거반대를 넘어 이승만 퇴진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시민뿐 아니라 초등학생까지 시위에 참가 했습니다.
425, 대학교수들까지 시위에 나섰습니다. “쓰러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시민과 학생이 모여들고 시위가 밤새도록 이어졌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시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이승만은 물러가라수 만명이 모여 이승만의 퇴진을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파고다공원에 서 있던 이승만 동상도 끌어 내렸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나겠다고 말했답니다. 마침내 이승만이 국민 앞에 무릅을 꿇었습니다. 라디오방송을 통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외쳤습니다. 부패한 독재정권을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이 거대한 움직임을 사람들은 419혁명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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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은 중고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오게 했다>
 

 
4·19혁명은 민중이 스스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부패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혁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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