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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진주소년회 100주년을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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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10회 작성일 20-07-2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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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진주소년회 100주년을 맞이하다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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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교육지원청 앞 표지석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고 했던가? 진주도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 알면 알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역사의 시간을 품은 곳이 진주다. 아다시피 55일은 어린이날이다. 오늘의 어린이날이 있게 한 시작이 진주다. 어린이날의 의미를 되뇌기 좋은 곳이 진주 도심 속 진주교육지원청 주위에 있다.

 

진주성 정문인 공북문에 차를 세우고 곧장 걸음을 향하지 않았다. 교육지원청 옆 진주초등학교로 먼저 들렀다. 학교 정문 옆에 붙어 있는 <경상우도 소학교 터> 표지판이 눈길을 먼저 끈다. 1895년 경상우도 소학교는 진주성 내 관찰부 회의실에서 문을 연 학교는 두 달 만에 휴교에 들어갔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의병봉기 등으로 나라가 을씨년스러웠기 때문이다. 이후 1896년 문을 다시 열었다. 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공학인 여자학급(3년제)을 설치했다.

 

진주초등학교가 전국 최초의 남녀공학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꼼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정빈이 공사비를 지원해 여학생 전용 교실 2칸을 신축 기증한 덕분이다. 김정빈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 시집가서도 가정을 버리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남편을 대신해 삯바느질과 품팔이로 생계로 유지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개똥을 주워 모아 팔고 채소장사 등을 해 자수성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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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표시석 제막식 개최>
 



인근에 있는 진주교육지원청에 이르자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라는 표지석과 함께 우촌(雨村) 강영호(姜英鎬, 1896~1950) 선생 흉상이 반긴다. 진주교육지원청 앞마당에는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라는 큼지막한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을 중심으로 왼쪽의 강영호 선생의 흉상과 소년운동에 관한 안내판이 자리한다.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 선생은 19233<어린이> 창간호에서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회합의 성질을 띤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맨 처음이었습니다라고 했다.

 

강영호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 중 방정환, 정순철, 손진태, 고한승 등과 색동회를 조직했다. 1920년 경남·전남 일대에 항일전단 수천 장을 배포하려다 일본 경찰에 발각돼 체포되기도 했다. 1927년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로도 활동했다. 선생은 전남 여수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며 숨어지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당했다. 한편, 진주봉래초등학교 설립자인 강재순의 셋째 아들인 선생의 맏형은 우리나라 근대 인권 운동의 효시로 알려진 형평운동을 펼친 백촌 강상호 선생이다.

 

하나의 장소에는 하나의 시간만이 머물지 않는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우리가 알고 익히며 기억 너머의 수많은 시간이 말을 건넨다.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흔적을 찾아오는 이에게 장소가 품은 역사는 시간여행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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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호선생 (雨村 姜英鎬, 1896~1950 )

 

진주에서 태어난 소년운동가휘문중학교를 나와 16세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였고 방정환정순철손진태고한승 등과 색동회를 조직했다. 1920년 경남·전남 일대에 항일전단 수천 장을 배포하려다 일경에 발각돼 체포되기도 했고, 1927년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로도 활동했다진주의 부호였던 강재순의 셋째 아들로그의 맏형은 형평운동을 이끌었던 백촌 강상호이다일제 말 여수에서 광산 노동자생활을 하며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숨어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 시기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희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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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신안동에 있는 강영호 선생 기념비>



 



 


진주의 소년운동,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시작이 되다

 


진주소년회 19208월 조직, 올해 100주년


국가기록원 나라기록에는 소년운동은 3·1운동 이후 민족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소년단체의 조직은 서울보다 지방인 안변진주광주왜관 등에서 먼저 결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진주 외에도 안변왜관 등지에서도 소년회가 세워지기도 했으며안변왜관의 소년회는 진주보다 앞서기도 한다그럼에도 진주를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로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주소년회가 조직된 것은 1920년 8월로,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소년회가 만들어지기 9개월 전이었다우선 관련 사실들을 몇 가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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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촌 강영호의 젊은 시절. 

 


①『천도교회월보- 1922 5월호

 

금일의 소년문제는 실로 천하의 문제이며 소년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데 의하여 비로소 천지운절(天地隕絶)의 기를 보할 수 있다하는 것이 금일 식자배(識者輩)의 공통으로 떠드는 소리이외다....춘만건곤(春滿乾坤)에 복만가(福滿家). 

 

우내(宇內)의 태운(泰運)이 청제(靑帝)의 수레를 타고 동출(東出)의 고국(故國)을 두루 찾을 때 그 태화(泰和)의 일지운(一技運)이 어리고 고운 소년의 사회에까지 핑돌게 되었습니다.

 

경남 진주의 소년들이 제일착으로 그의 대운에 참여하였으며천도교의 소년 남녀들이 연()하여서 새빨간 횃불을 들었습니다.”


 

②『어린이- 1923년 3(창간호)

 

글방이나 강습소나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회합의 성질을 띄인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맨 처음이었습니다

 

③ <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진주지방은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발을 든 곳인데오늘은 300명의 회원을 가진 천도교 소년회 주최로 오후 3시에 선언문을 돌리고 밤에는 기념강연을 한다더라


 

진주소년회보다 안변왜관의 소년회가 앞섰음에도 진주소년회를 본격적인 소년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어린이지 창간호에서 소파 방정환이 언급했듯 사회적 회합의 성질’ 때문이다방정환을 비롯한 소년운동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식민지지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린이운동을 독립운동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시작했다당시 소년(어린이)의 연령층은 19세까지로 폭이 넓었으며압박받는 자의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메이데이(노동절)와 같은 날인 5월 1일로 어린이날을 제정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진주의 소년운동도 마찬가지였다독립운동의 하나로 시작되었고진주의 천도교에 튼실한 뿌리를 두고 1920년 8월 시작하였다진주소년회가 지닌 사회적 회합의 성질은 진주소년회의 활동을 살펴보면 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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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20-08-01 13:14:31 기사작성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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