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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기행] 남한 단독정부수립과 제주 4.3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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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431회 작성일 13-04-0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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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단독정부, 영구분단의 강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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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신탁통치파동을 겪으며 좌파가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국내 정세속에 남한마저 공산화하려는 소련과 한반도를 전체를 포기하더라도 반쪽이라도 차지하려는 미국은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통일된 국가를 꿈꾸었고 미군정의 남한은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한민당이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지만 신탁통치논란을 겪으면서 좌우이념대립을 통해 우익의 지지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이 곧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게 된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운동은 이러한 한반도의 분단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만약 한시적 신탁통치안인 모스크바 3상회의안이 진행되었다면 남북은 하나의 통일국가는 되었겠지만 미국이 원하는 국가보다는 소련이 바라는 국가가 탄생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미국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추진하게 된 원인은 이렇듯 간단하다. 좌우합작이나 남북연합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당시 광범위한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좌익세력을 볼 때 이승만과 미국은 한반도를 통째로 내어 줄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신탁통치안이 결렬되자 미국은 “조선 문제가 유엔총회에 상정됨에 따라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조선을 독립시키는 수단이 강구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에 대해 소련은 미·소협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미국은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설치하고 그 감시 하에 1948년 3월말까지 남북간의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회 및 정부를 수립하고, 미, 소 양군이 철수한다”는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했다.
 
이 안이 가결되자 8개국(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으로 구성된 유엔 위원단이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오게 된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은 감시단의 입국을 거부하게 된다. 이에 유엔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안을 다시 제출, 통과하게 됐다. 결국 북쪽의 거부로 38도선 이남에서만 5.10선거를 실시, 헌법이 제정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이 선포됨으로써 분단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 4.3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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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단독정부는 곧 한반도의 영구적인 분단을 암시했기에 나라를 잃은 일제의 암흑기를 보낸 대부분의 민중들은 좌우익의 이념을 떠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김규식등이 끝까지 통일조국을 꿈꾸며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김구가 마지막까지 남북협상에 매달린것 역시 민족의 분단은 막아야 한다는 이유 하나였다.
 
남도의 작은 섬 제주도, 이곳에서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반대운동이 일었고 제주민중은 가장 치열하고 가장 처절한 투쟁을 진행하였다.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하면서 빨갱이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미군정과 이승만정권 그리고 우익단체에 의한 대대적인 양민학살이 발생했다.
 
당시 대다수 제주도 주민들은 일제를 대신해 들어 온 미군정이 민심을 반하는 정책을 계속 실시한데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남한내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민족통일에 반하는 일이라며 반대하는 기운이 거셌다. 그런 의식이 확산되어 미군정이 남한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5월10일에 실시한 단독선거 결과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남았다.
 
이렇게 제주도민 다수가 좌익 성향의 태도를 보인 대가는 처참했다. 5.10단독선거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민 전체를 빨갱이로 낙인찍고 무차별적인 살육을 저질렀다. 공산주의자 처단 명목으로 엄청난 수의 양민을 학살했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빨갱이 처단을 내세웠지만 실제는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구실을 찾는 게 더 큰 목적이었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북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고, 미국과 친일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했던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한다. 이 과정에서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정반대’를 외치며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데 이것이 여순반란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까지 발표한다. 
 
따라서 살육대상이 진짜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익성향의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조금만 왼쪽으로 치우친 사고를 가졌거나 그와 같은 행동을 보인 사람은 모두 빨갱이었다. 좌익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가족도 모두 빨갱이였으며 그런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동조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도 모두 빨갱이였다. 도처에 빨갱이 아닌 사람들이 없어서 토벌중에는 아무나 보이는 대로 총질을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군경토벌대와 우익단체의 살육방법은 도저히 인간이 한짓이라고 믿을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빨갱이라고 추측되는 사람이 도망가고 없을 때는 그 가족을 대신 죽였다. 빨갱이로 지목한 사람을 끌어내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직접 죽이게까지 했다. 어미를 죽이고 그 옆에 누워 버둥대는 갓난아이에게까지 총을 겨눴다. 여성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을 준 뒤 살해했다. 군인들에게 훈련삼아 살해를 명령하기도 했으며 총알이 아깝다고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질을 하기도 했다. 한꺼번에 모아 놓고 수백명을 죽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죽어간 사람이 무려 2만 5천여명에서 3만명을 헤아린다. 이유는 단지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것 그것뿐이다.
 
1954년 9월 무장봉기세력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7년 7개월동안 제주도에서 자행된 이 끔찍한 사건도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 사건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당시에 벌어졌던 학살의 실체가 다 드러나지 않았을뿐 아니라 당시 학살을 계획하고 명령했던 사람 그 누구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지않았기 때문이다.
 
제주도민의 10%, 3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이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양민학살. 수십만의 민중들이 반대했다면 그 권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목숨까지 내놓고 맨 몸으로 저항한 그들이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무고한 생명을 짓밟으며 제나라 국민을 다 죽여서라도 이루고자 했던 것이 대한민국이고 자유고 민주주의일리는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잠들지 않는 남도’라 했다. 아마도 잠들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60여년이 지난 2013년 대한민국에서도 그 참혹했던 시간을 ‘폭동’과 ‘항쟁’으로 나눠 쓰고 있으니 말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그래서 과거는 단순히 과거일수 없다.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고똑바로 가르치며 바르게 평가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미래를 만드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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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순시중인 이승만대통령>
 
[필통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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